지난 2년 간 전 세계에 휘몰아친 코로나19 펜데믹은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만들었다. 해당 시기의 상징이 된 ‘비대면(Untact)’ 키워드가 삶 곳곳에 침투하면서 우리 일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자아냈다. 온라인 플랫폼이 의‧식‧주 전반을 잠식했고, 전 세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코로나 사피엔스’라는 신인류로 편입됐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변화가 일어난 곳은 유통‧소비 시장이다. ICT분야의 눈부신 성장이 ‘격리’를 요구하는 외부 환경과 맞물리며 이커머스의 잠재력을 폭발시킨 것. 전문가들은 “코로나 유행이 향후 수년 간 진행될 유통시장의 진화를 단번에 이뤄냈다”고 입을 모은다. 온라인의 문턱이 버거웠던 중장년층까지 ‘엄지족’ 대열에 합류시킬 정도의 파괴력이다.
새롭게 마련된 판에선 경쟁 방식도 새롭다. 상품의 양과 질로 승부하던 유통시장은 이제 소비자 경험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배송을 전제하는 이커머스의 특성상, 최고의 소비자 경험은 결국 ‘속도’로 완성된다. 유통업계에서 ‘퀵커머스’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배경이다. 전 세계 600조원 규모가 예측될 정도의 높은 시장성은 유통기업들이 채비를 더욱 분주하게 만든다. 시간을 넘어 분 단위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퀵커머스 지형도를 [기업경제신문]에서 분석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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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에서 퀵커머스(즉시배송)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
| ‘배민’이 쏘아올린 ‘빠른’ 공
“집 근처에 널린 게 동네마트나 편의점인데, 굳이 배달까지…?”
지난 2019년 11월, ‘배달의민족’이 ‘B마트’라는 이름의 서비스를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해도 기대보단 의구심이 많았다. 고객이 주문한 상품을 1시간 내에 배송해주는 즉시배송 서비스, 이른 바 ‘퀵커머스’였다. 오전에 주문한 상품을 오후에 받아 보는 ‘당일배송’이나 익일 새벽까지 배송이 완료되는 ‘새벽배송’보다 훨씬 민첩하다. 유통기한이 긴 공산품 등을 자체 물류 창고에 채워놓고 주문과 동시에 배달이 이뤄지는 식이다.
당일에서 새벽, 총알에서 로켓으로 이어지는 배송 속도전에 “과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시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배달 앱 등의 플랫폼을 통해 극강의 편의성을 만끽한 소비자들은 B마트를 통해 라면이나 우유, 생수 같은 생필품을 하나 둘 주문하기 시작했고, 소비자의 호응을 힘에 업은 B마트는 취급 품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며 ‘집콕시대’의 장바구니를 채워나갔다. ‘퀵커머스’의 시대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2019년 첫 선을 보인 B마트는 무섭게 시장에 파고 들었다. 이듬해 추정 매출액이 전년 대비 328%나 급증했을 정도. 업계에선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것 같았던 커머스 분야에서 새로운 욕구를 찾아내 이를 만족시켰다”며 혀를 내둘렀다. 비결은 다양하다. 국민 배달앱으로 불리던 배달의민족 내 하위 서비스로 접근성을 높였고, 이를 통해 구축된 라이더(배달기사) 풀과 도심 곳곳의 물류창고로 라스트마일 물류처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완성했다. 코로나19펜데믹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며 비대면 장보기 수요가 급증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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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커머스의 신호탄을 쐈던 B마트 |
| 발 묶인 소비자의 호응… 시장성을 검증하다
“요즘 배송 참 빠르잖아요. 주문한 다음 날 바로 받아보는 정도도 신기할 따름이었죠. 그런데 딸아이가 퀵커머스를 알려주더라고요. 처음엔 ‘뭐 그렇게까지…’했는데, 생각보다 쓸 일이 많더라고요. 갑자기 식재료 하나가 없는 상황이라던가(웃음)…. 주문 후 1시간 내외로 받을 수 있고, 동네마트보다 품목이 다양한 것도 좋았어요.”(김기식‧61세‧인천 연수구)
“생수를 주로 주문해요. 사오기 귀찮고 무겁잖아요. 배송비가 조금 더 들지만, 직접 가서 장보는 데 소모되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하면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고요.”(김예진‧27‧부천 송내동)
퀵커머스는 점점 우리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다. 몇 년 전 온라인 쇼핑이나 배달 플랫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직접 사용해본 소비자들은 한 목소리로 “처음엔 낯설었지만, 한번 써 보니 계속 쓰게 되더라”고 귀띔한다. 지난해 B마트의 주문 건수가 1000만 건에 달하는 이유다. 퀵커머스 플랫폼의 한 관계자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음료수 하나 배송시킨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넷플릭스보다가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싶으면 배달시킬 수 있는 시대”라면서 “편의와 빠름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면서, 소비자의 인식 전환이 이뤄졌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이 무르익을수록 취급하는 품목의 경계도 옅어진다. CJ올리브영은 자사에서 판매하는 화장품을 즉시배송해주는 ‘오늘드림 빠름배송’ 서비스를 통해, 전년 대비 12배에 달하는 주문 건 수 증가 효과를 누리고 있다.
수요는 공급을 부채질한다. 퀵커머스가 최근 유통업계의 뜨거운 감자인 것도 그래서다. 이미 세계 시장에서도 “2030년까지 약 600조 원 수준의 성장할 것”이라며 예의주시하고 있는 분야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B마트 따라잡기’에 나선 건 쿠팡이다. 지난해, 7월 쿠팡 특유의 속도감을 앞세워 시장에 합류했다. 쿠팡이츠 앱에 '마트' 카테고리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B마트의 그것과 꼭 닮았다. 국내에 당일배송의 개념을 정착시킨 저력에, 최소주문 금액을 없앤 가격 경쟁력이 쿠팡의 최대 무기다. 쿠팡이츠 마트는 서비스 출시 반 년 만에 강남구 대치동에 4호점까지 오픈하는 등 점차 서비스 지역을 확대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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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마트에 도전장을 던진 쿠팡이츠마트 |
| 빠르게 더 빠르게…발바닥에 불난 유통업계
배달플랫폼의 강자들이 만든 판에 최근 유통기업들도 속속 참전하는 모양새다. 소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걸 수치로 확인한 이상 더 이상 시장 진출을 늦출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퀵커머스 분야는 현재 소비자의 니즈와 미래 성장 가능치가 충분히 검증된 시장”이라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장인 만큼 전통 유통기업들 역시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눈여겨 볼 도전자는 롯데, 이마트, 홈플러스, GS 등 SSM(기업형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기업들이다. 자사가 보유한 SSM이 자연스레 물류창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품 확보와 빠른 배송이 원활하다는 분석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SSM 특유의 주거지 접근성은 속도에 민감한 퀵커머스에 기회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GS수퍼마켓은 지난해 여름 1시간 배송을 앞당긴 ‘49분 번개배달’ 서비스를 선보인 뒤 4배가량의 매출 증대 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백화점 역시 지난해 7월, 백화점으로선 처음으로 신선식품 즉시배송 서비스를 선보였다. 현대차그룹이 개발한 이동형 ‘마이크로 풀필먼트 센터(MFC)’를 활용해 신선식품을 30분 내로 배송해주는 서비스다. 경쟁사인 신세계 역시 SSG닷컴을 통해 당일배송을 확대하고 있다. 이밖에도 hy와 카카오엔터프라이즈가 퀵커머스 사업을 위해 동맹을 맺고, 네이버가 ‘NFA’(네이버 풀필먼트 얼라이언스)를 통해 퀵커머스의 영역을 키워가는 등 점차 전장이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국내 퀵커머스는 거래액은 3000억원 수준으로, 이커머스 전체 시장 규모(161조원)를 감안하면 아직은 절대 지배자가 없는 초기 시장으로 봐야한다”면서 “향후 자본과 기술력, 인프라가 풍부한 후발주자들의 활약에 따라 시장 판도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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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체인 시스템을 갖춘 전기트럭을 활용하는 현대백화점의 신선식품 즉시배송 서비스 |
| 배달 분야 피로도, 골목상권 붕괴 우려는 여전
퀵커머스는 이미 전 세계적인 트렌드다. 진화를 거듭하는 IT 인프라에 점점 촘촘해지고 있는 물류 시스템이 결합되면서, 향후 미래 시대의 커머스 분야를 좌지우지할 총아로 꼽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보다 큰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인터넷 보급과 접근성에서 손꼽히는 ICT 인프라 강국인데다, 새로운 서비스에 대해 관대한 특성도 우호적인 요건이다. 여기에 특유의 ‘빨리빨리’ 정서도 퀵커머스에 최적화된 기질이다.
하지만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가장 많은 지적이 모이는 곳은 역시 ‘골목상권의 쇠퇴’ 부분이다. 대형 이커머스 플랫폼이나 유통대기업들이 대부분 자사의 물류센터를 독자적으로 관리하는 만큼, 퀵커머스의 성장이 지역 중소마트의 매출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업계 관계자는 “골목상권에서 소매유통 기능을 담당하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은 도태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소득 양극화와 일자리 상실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조언했다. 배달 플랫폼으로 야기되었던 배달 분야의 ‘출혈경쟁’과 플랫폼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 역시 지역 상권의 붕괴 이슈와 맞닿아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지난해 말부터는 퀵커머스 상생모델이 등장하기도 했다. 퀵커머스의 잠재력에 지역 상권과의 상생을 결합한 형태로, 플랫폼업체가 자체상품을 취급하는 대신 동네마트 물건을 배달해주는 방식이다. 메쉬코리아의 ‘토마토’나 ‘동네마트’에서 브랜드명을 바꾼 ‘로마켓’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 기업 담당자들은 “우리 모델을 통해 퀵커머스가 지역 소상공인업계와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역시 소비자의 선택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퀵커머스 시장을 끌어올리는 건 결국 소비자의 니즈인데, 입점업체 수가 1000개에 불과한 지역 상생 플랫폼이 어느 정도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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